카티츠의 초여름 끝에서
일자
2024.04.14
GM
참가자
휴지
지독한 레쥬비앙들...
카티츠의 초여름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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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과 완벽한 날씨…….
당신은 언제나처럼 오전 10시에 눈을 뜹니다.
침대 옆에는 언제부터인가 낡은 일기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앗, 저 여기 알아요! 당신은 여기서 당연하다는 듯 일기장을 넘기겠죠?
제가 누구냐고요? 당신의 ‘일기장’이잖아요!
뭐, 굳이 애칭을 붙여주고 싶다면 마다하지 않겠지만요!
아무튼, 오늘을 시작할 시간이에요.
정신 차리고 일기장을 넘기라구요!
루시:(반쯤 감긴 눈으로 일기장을... 연다. 기시감이 과하다 못해 권태스러움까지 느껴진다.)
[카티츠 3년 7월 1일. 티타임을 가지다가 독살당했다.
비얘 (GM):](#" style="text-decoration: none; color:#333333; font-size:12px; font-weight: normal;)
그 뒤로도 끊임없이 이어진 기록들은 당신의 ‘사망 내역’입니다.
언제 어떻게 사망했는지에 관하여 나열되기만 한 내용들이죠.
정확히 열아홉 번의 죽음이 기록된 일기장을 덮기 무섭게 하녀 아이가 부산스러운 소리를 내며 방 안으로 들어옵니다.
하녀:좋은 아침이에요, 아가씨! 오늘은 백작 부인의 연회에 가시는 날이죠?
7월 1일부터 연회라니, 좋은 징조일지도 몰라요!
루시:7월 1일이... 무슨 특별한 날이야? (꿈뻑거리는 눈이 아직 잠에서 덜 깬 것처럼 움직인다. 지쳤어. 가지 말고 그대로 누워있고 싶었다.)
하녀:에이, 아가씨. 또 귀찮다고 하지 마시고요. (하녀가 쪼르르 다가오더니 나른하게 누워있던 루시를 잡고 일으켜세웠다.) 어서 준비하셔야죠, 오늘 연회에는 아가씨 또래의 영애들이 잔뜩 오는걸요. 친구가 생길지도 몰라요!
루시:아니, 별로 안 가고 싶은데. (어차피 여자에게 약한 루시는 버틸 힘이 있음에도 하녀 손에 질질 끌려간다. 그래. 쉬어봤자 또 암살자나 만나겠지. 어기적어기적 수준의 걸음걸이로 연회에 갈 채비를 하러 떠난다. 친구따위는 안 생길테지만, 분명 그 사람이 있고, 술도 있으니까. 그것 뿐이다...)
루시를 앉혀놓은 하녀는 정성껏,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그의 머리를 빗어줍니다. 몇 번이나 죽음을 넘어온 루시의 속도 모른 채로요.
루시:
정신
기준치: 70/35/14
굴림: 48, 32, 88
+2: 어려운 성공
+1: 어려운 성공
  0: 보통 성공
-1: 보통 성공
-2: 실패
정신
기준치: 70/35/14
굴림: 32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또다시 돌아온 7월 1일입니다.
언제쯤 이날을 끝낼 수 있을까요?
다만, 너무 많이 죽은 탓인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집니다. 어쩌면 어딘가 망가졌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뭐 어때요? 어차피 당신은 오늘도 죽을 텐데요.
...
오늘은 어떤 방법으로 죽게 될까요?
지금까지는 이전과 한 번도 겹치지 않았으니, 필시 참신한 방법일 겁니다. 뭐……. 이제 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지만요.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요?
갓 성인식을 치르고 이제 어엿한 에딜루스의 귀족이 될 일만 남았다며 순수하게 기뻐하던 때가 전생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전생이나 다를 바가 없긴 하지만요.
...
이쯤에서 잠깐 당신의 가문과 나라를 소개할까요?
주신, ‘에딜루스’를 믿는 에딜루스 제국은 신의 힘을 받은 황족들 덕에 안온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누릴 수 있었죠.
사람을 복속시키는 힘을 가진 황족들 덕에 반란 한번 없었던 강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은 과연 존재할까요?
신이 존재한다면 당신에게 이럴 리 없을 텐데요. 적어도 완전한 안식에 들게 하든가, 이 끔찍한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당신이 여전히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제국은 지난 몇백 년처럼 국민 대다수가 신의 존재를 의심조차 하지 않습니다. 존재에 의구심을 가지기에는 신의 힘을 직접 사용하는 황족이 있었으니까요.
좋아요, 제국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당신의 가문에 대해 이야기해 볼래요? 열아홉 번의 반복 끝에 가문이라는 인식이 희박해졌을 수도 있겠지만요.
루시:첫번째, 나는 이 돈독오른 가문의 사생아이며,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했고, 몇몇 하녀 빼고는 전부 나를 까마귀 공녀라고 비웃는다. 둘째, 나 또한 가문에 대한 충성심은 없으며, 어차피 남동생에게 돌아갈 작위따위 관심도 없다. 이 외에는 딱히 기억 안 나. 기억 할 필요도 없어.
으아앙...
그러고 보니 바스커빌 가문은 유서 깊은 공작 가문이었죠. 그런 가문의 장녀라면 다들 친하게 지내고 싶어할 거예요.
루시, 매혹 기능이 1d15 만큼 상승합니다!
루시:
매혹
기준치: 15/7/3
굴림: 52
판정결과: 실패
rolling 1d15
(
11
)
=
11
...
한참이나 바쁘게 방을 돌아다니며 정리하던 하녀 아이가 깍듯하게 인사를 마치고 방을 떠납니다.
이제 다음에는 시종이 들어와 치장을 도와줄 차례죠.
점심에는 하녀 아이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백작 부인의 연회에 가야 하니까요.
데올란 백작 가문은 황가에 충성을 다짐하는 다른 에딜루스 제국의 귀족과는 달리, 드물게 중립을 유지하는 가문입니다.
백작 부인은 과거 사교계의 꽃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었고요.
단점이 있다면 귀족 예법에 몹시 깐깐하다는 점 정도일까요. 스무 번째의 삶을 사는 당신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만요.
여기서 난동을 피운대도 어차피 사람들은 오늘 아침이 되면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 겁니다.
아, 유일하게 기억해 둘 만한 건 이 연회에서 죽은 적이 있다는 것이겠네요.
열세 번째 삶이었나…… 난데없이 샹들리에가 떨어져 즉사하고 말았죠. 이미 지나간 죽음은 반복되지 않으니 적어도 샹들리에에 맞아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차, 주황색 머리카락과 푸른색 눈동자에 주근깨가 콕콕 박힌 얼굴을 한 시종 에단이 들어와 익숙하게 치장을 도와줍니다. 열아홉 번 동안 그랬듯, 짙은 푸른색 정장이네요.
에단:아, 아가씨.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당신의 머리를 땋다말고 에단이 당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버립니다.
루시:괜찮으니까 계속 해. (설마 머리카락이 뽑혀 죽는건 아니겠지. 그건 너무 없어보이잖아.)
에단:아가씨, 정말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요... (바들바들 떠는 손으로 훨씬 조심스레 루시의 머리카락을 땋아나간다.)
머리카락이 잡아당겨진 것도 저번 삶과 똑같네요.
오늘도 역시 지난 열아홉 번과 같은 하루가 될 모양입니다.
헤프닝 아닌 헤프닝이 끝나고 익숙한 마차에 올라 백작 부인의 연회로 향합니다.
처음 이 마차에 올랐을 때는 이제야 정식으로 사교계에 입성한 느낌이 들어 설레기도 했었을 텐데, 지금은 아무런 감상도 들지 않습니다.
굳이 꼽자면 오늘은 어떻게 죽을까 고민하는 것 정도가 될까요.
눈에 익은 장식들, 팔이 움직이는 각도까지 똑같은 맞이 인사…….
그 모든 게 끝나자 떠들썩한 연회가 시작됩니다. 낮에 열리는 연회라 그런지 티파티에 가까운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익숙하겠지만요.
아, 설명을 너무 많이 했더니 목이 좀 마른 것 같기도 하고…….
혹시 가지고 있는 음료가 있을까요? 저와 거래해요!
루시:(일기장이 말이 많다... 대충 아무 잔이나 집은 루시가 팔을 살짝 들어올린다. 너한테 어떻게 주면 되는데?)
루시가 들고있던 잔에서 액체가 스르륵 사라집니다...
고마워요! 보답으로 오늘 연회에서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도와드렸어요.
...
그럼 계속 당신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화려한 연회, 왁자한 사람들, 즐거운 춤곡까지 뭐 하나 변한 게 없네요.
샹들리에도 천장에 잘 붙어 있고요.
보통 이쯤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오곤 했으니 이번에도…….
거기까지 생각한 찰나 누군가 눈에 밟힙니다.
익숙한 얼굴, 그러나 낯선 등장.
열아홉의 지긋지긋한 반복을 거치는 동안 매번 반응이 달랐던 단 한 사람, 로제타입니다.
지금까지 백작 부인의 연회에서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생의 ‘새로운 반응’은 이것이었을까요?
로제타는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당신을 발견하고는 이쪽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로제타 :별 일이네... 네가 이런 데 다 오고. 원래 이런 곳 좋아했었나?
루시:아뇨. 안 좋아하는데, 로즈가 보고 싶어서 왔어요. 로즈라면 분명 올 테니까. 저번처럼 울면서 오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저번 생이라서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루시가 기쁜 마음에 말을 우다다 쏟아낸다. 로제타 앞에서는 항상 이렇게 바보가 된다. 그녀가 말을 끝내고 머쓱하게 웃었다.)
로제타 :내가 저번에 울면서 왔었어? (루시에게 한 발자국 다가간 로제타가 루시의 손을 붙잡더니 연회장 구석으로 이끈다.) 이야기하기에는 여기가 좋을 것 같아서. ...미안해, 기억이 안 나네. 나 그때 왜 울었었더라?
루시:드레스 등 쪽 끈이 풀려서 옷이 내려갈 뻔 한 걸 제가 가려줬어요. (영애들 중 그 누구도 상관 없었겠으나 루시는 그녀가 자연스럽게 자신을 찾을 것을 알고 있었다. 타인에게 부탁했다간 평판도 잃을 뿐더러,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을테지. 무도회에서 겉옷을 벗을 수 있는 영애는 루시 외엔 없을 테니까. 그러나 그녀가 그때 일을 기억 할 리는 없었다. 전생이니까. 루시가 흐릿하개 웃었다.) 음, 아닌가? 죄송해요, 로즈. 제가 잠이 덜 깨서 기억이 왔다갔다 해요. (루시가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폭, 기댄다.)
로제타 :아냐, 기억 못 하는 건 나인가봐.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기억해주고 있는걸. 그런 일 있을 때 내가 도와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너 말고 누가 있겠어? (제 어깨에 기댄 루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자신보다 키가 한참 큰 주제에 몸을 잔뜩 쭈그리고 기대오는 것이 사랑스러워서 로제타가 쿡쿡 웃었다.) 어쩐지 오늘 여기 오고 싶더라니, 네가 올 것 같아서 그랬나봐. 왜인지는 모르지만. (로제타가 루시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에게서 조금 떨어뜨려놓은 뒤 루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오늘 예쁘네?
루시:그럴리가요. 로제타 앞에서 저는 얼굴도 못 펴요. (루시가 머리에 닿는 손길에 완전히 몸에서 긴장을 풀어 로제타에게 안긴다. 이렇게 안아줬던 적이 있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로즈가 훨씬 아름다워요. 다른 사람들은 절대 로즈를 못봤으면 좋겠을 정도로...
로제타 :뭐래, 정말! 낯 간지러워. (얼굴을 붉힌 로제타가 아프지 않게 루시의 어깨를 찰싹 때린다.) 오늘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이렇게 예쁘게 하고 온 거야, 응? (제 가슴에 안긴 루시에게는 이 심장소리가 전부 들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끄럽지만 싫지는 않았다.)
루시:아시잖아요. 저는 로즈 외엔 보여줄 사람도, 만날 사람도 없다는 걸. (로제타의 심장박동은 항상 고요하고 따듯했다. 매번 다른 등장에도 유일하게 같은 이것이 로제타가 그녀임을 루시에게 확신시켜 주는 것들 중 하나였다.) 제가 낯 간지러운 말을 하는 거, 로즈는 싫나요?
로제타 :아니, 너무 능숙해서 의심하는 거지.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 말하고 다니는 거 아닌가, 해서. 너한테서 진짜 좋은 냄새 나네... (루시의 머리카락에다 대고 한 번 숨을 들이쉰 로제타가 키득키득 웃는다. 웃을 때 루시의 몸도 같이 작게 움직였다.) 있잖아, 오늘 너희 집 가도 돼?
루시:(열 아홉 번째 사랑이니까 능숙할만도 했다. 로제타는 아무것도 모를 테지만. 루시가 애매하게 웃었다. 당신이 이 웃음의 의미를 알면 좋겠어.) 저는 좋아요.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모르겠으나, 어차피 죽게 되는 건 저 혼자니까 상관없겠지. 저택이 통째로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루시는 로제타 만큼은 살리고 다음 생으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별로 재미있는 곳은 아니지만.
로제타 :네가 있는데 재미 없을 리가. (루시의 손을 잡은 로제타가 방긋 미소 지었다.) 오늘 운이 좋네, 여기 와서 너를 만난 것도 그렇고, 갑자기 부탁했는데 허락 받은 것도 그렇고.
로제타가 저택에 방문한다니, 정해진 일과 어긋나는 상황이네요.
로제타야 늘 정해진 것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사람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죠. 당신이 오늘 죽을 예정이라는 건 변하지 않겠지만요.
왜 로제타만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반응인지 모르겠지만, 로제타가 당신의 '변수'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적당히 체면치레한 당신은 이제 저택으로 돌아갑니다.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로제타라는 정의할 수 없는 묘한 존재를 옆구리에 끼고서요!
손님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오자 사용인들이 빠르게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차를 내오고, 급히 디저트를 만들고……. 준비가 미흡한 건 아니지만, 완벽한 것 또한 아닙니다.
하지만 로제타가 뭐라고 할 처지는 못 되죠. 먼저 갑작스레 요청한 사람은 다름 아닌 로제타니까요!
응접실에 앉아 로제타와 어색하게 마주 보고 있습니다.
당신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사용인들이 준비한 홍차가 오늘따라 씁쓸하게 느껴지네요.
이전에도 비슷한 티타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당신 혼자만의 티타임이었지만요.
그땐 아마 독을 먹고 죽었었죠? 그러니 이번의 티타임에서 당신이 죽을 일은 없을 겁니다. 로제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요.
로제타 :갑자기 오겠다고 했는데 차까지 내어줘서 고마워. (로제타가 찻잔을 들고 코 가까이에 댄다.) 향 진짜 좋네. 공작가에서 쓰는 건 뭐가 되어도 다른가봐.
루시:로제타, 찻잔에 뭐가 묻었어요. (루시가 재빨리 일어나 그녀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잔을 가져온다. 이윽고 자신의 잔과 그녀의 잔을 바꾼다.) 죄송해요. 급하게 준비하느라 확인을 못했어요. 사용인들에게 언질해둘게요. 이런 실수 두 번 다시 없게 하라고.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들 투성이에 영애의 고귀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말투였으나, 루시는 그녀가 죽느니 자신이 비호감이 되는게 낫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저번에 독살로 죽은 경험이 있으니, 제 잔에는 독이 없을게 분명했다.)
로제타 :(꿈뻑... 순식간에 찻잔이 바뀐 로제타가 루시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거린다.) 으, 으응. 고마워... 나는 별로 상관 없는데. 그보다 뭐가 묻은 찻잔이라며. 네가 마셔도 괜찮은 거야? (멍한 얼굴로 루시를 쳐다보던 로제타가 이내 쿡쿡 웃는다.) 루시는 정말 세심하네. 항상 내 생각 해주고. 네 이런 점이 정말 좋아.
루시:저야 차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루시가 한 번에 차를 왈칵 들이킨다. 여전히 좋은 차인지 아닌지 모르겠어.) 로제타, 이런 말 이상하게 들릴 순 있지만, 혹시 여기 오고 싶었던 이유가 따로 있나요? (어떤 전생도 그녀가 찾아오겠다 불쑥 말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루시는 궁금했다. 로제타는 이렇게 갑작스레 일정을 잡는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아서...)
로제타 :...... (말없이 차를 들이키던 루시를 바라보던 로제타가 한참의 정적 뒤에 입을 연다.) 역시 너무 갑작스러웠지? 원래 미리 약속 잡고 와야 하는 게 예절인데. 음... 그냥 와보고 싶었던 것도 있고. 네가 지내는 곳이잖아. 하고 싶었던 말도 있었고. 근데 이건 나중에 얘기해줄게. (홀짝... 천천히 차를 마신 로제타가 소리 내지 않고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두었다.) 있지, 괜찮으면 같이 신전에 가지 않을래?
루시:로즈, 신학에 관심 있었나요? (정말 궁금했지만 겨우겨우 참아낸 루시가 대화를 돌린다. 신전이라니. 저택에 오고 싶었다는 소리보다 더 뜬금 없는 소리였다.) 로즈가 저랑 가고 싶다면, 갈래요.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신전에서 큰 일이라도, 끽해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나 싶었다.)
로제타 :자꾸 뜬금없는 이야기해서 미안해. 요즘 기도하고 싶은 게 좀 생겼거든. 그런데 간다면 너랑 같이 가고 싶어서. (흔쾌히 돌아오는 수락에 로제타의 얼굴이 밝아진다.) 고마워. 오늘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데도 다 받아줘서. 갈까?
루시:(기도? 무슨? 루시으 눈동자에 의문이 스쳤으나 이내 사라진다. 생각해보니 자신도 신이 있다면 이런 삶은 계속되어도 괜찮으니, 로제타가 영원히 곁에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보고 싶었다.) 네에. (루시가 말꼬리를 늘려 대답한다. 먼저 일어나 자연스럽게 로제타에게 팔을 건네 에스코트 자세를 취했다.) 가실까요?
로제타 :(쿡쿡... 소리 낮춰 웃은 로제타가 루시의 팔을 붙잡고 일어선다.) 어머나, 멋진 기사님. 감사해요.
저택에 있나 신전에 가나 똑같습니다. 저는 당신의 생각까지 읽을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당신은 신전으로 향하기로 합니다.
하얀색 대리석과 황금으로 치장된 신전은 호화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아마 황궁 다음으로 화려한 곳이겠죠.
온 나라가 주신 에딜루스를 찬양해 마지않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요.
같이 신전에 가자고 한 게 무색하게 로제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기도하고 싶은 게 있다더니, 정말 기도라도 하러 간 걸까요?
그러고 보니 신전에 온 건 처음 아닌가요? 천천히 둘러보기나 할까요?
화려한 신전은 크게 기도실, 서재, 예배실로 나뉩니다. 어디를 볼까요?
루시:...로즈? 어디있어요? (잠깐 한눈 판 사이 사라진 로제타를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기도해야 한다고 했으니 기도실에 있으려나?...)
깔끔하게 정돈된 기도실입니다.
약간 어두운 분위기의 기도실에서는 은은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제국 최고의 작곡가가 작곡한 곡이라나 뭐라나…….
다른 특별한 것은 없고, 로제타도 이곳에 없는 것 같아요.
루시:(어딜 간거지?... 루시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진다. 혼자있으면 내가 지킬 수 없는데... 루시가 큰 보폭으로 예배실로 걸어갔다.)
신관들이 강연을 펼치며 신을 향한 예배를 올리는 제단과 신도들이 앉아 있는 의자들이 보입니다.
일렬로 정렬된 의자의 개수만 보아도 에딜루스를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습니다.
아득한 수의 의자를 보다 보니 머리가 아파지는 것 같기도 하고…….
루시, 이성 1 감소.
루시:(신이니 뭐니 이렇게 믿는 사람이 많다고. 루시가 비웃으며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서재밖에 남지 않았는데.)
오래된 책 냄새와 먼지 냄새가 뒤섞인, 약간은 퀴퀴한 향이 나는 서재입니다.
신전에 있는 만큼 신과 관련된 서적들로 즐비합니다. 건국과 함께 해왔던 신전이니 서재에 있는 장서량도 방대하겠죠.
어떻게 할까요?
루시:책은... 관심 없는데. (얼떨결에 고민하다 눈에 보이는 아무 책이나 집어든다. 이거라도 읽으면서 찾아다녀?...)
루시:
자료조사
기준치: 40/20/8
굴림: 72
판정결과: 실패
평소에 책을 좀 읽어둘 걸 그랬나봐요. 아무리 봐도 모르겠습니다.
이럴 땐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죠!
루시, 체력 1 감소.
경전의 해석이 모여 있는 서가에 눈길이 갑니다. 저쪽으로 가볼까요?
루시:(역시 책이랑 안 맞는다.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네. 가라니까 가야겠지. 루시가 서가 쪽으로 움직인다. 해석본을 본다해서 이해가 되려나?)
경전의 해석이 모여 있는 서가까지 오기는 했는데, 책이 어림잡아도 족히 천 권은 넘어 보입니다.
막막함이 치고 올라올 때쯤 당신은……
루시:
정신
기준치: 70/35/14
굴림: 26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정신을 집중하니 바닥에 떨어진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옵니다. 누군가 읽다 만 걸까요?
루시, 읽어볼래요?
루시:이건... 뭐야. 왜 책을 떨궈놨지.
세상에 오류가 있다고요? 어쩌면 틀린 추측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있잖아요. 그래요, 스무 번째의 삶을 살고 있는 당신이요!
하지만 당신이 오류라고 하기에는 죽음이라는 방법으로 여러 번 제거되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이 세계에 있는 오류는 무엇일까요?
서재를 나오면 서재에 작게 붙어있는 고해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들어가볼 거예요?
루시:로제타? 여기 있어요? (해석본이고 뭐고 점점 불안해진 루시가 냅다 고해실 안으로 불쑥 들어간다. 무례니 결례니 사생아한텐 하나도 중요치 않았으므로, 만약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한들 신경 쓰지 않았다.)
기대와는 달리, 지금은 고해하는 사람이 없는지 비어 있습니다.
따뜻한 오후의 햇살이 고해실 안을 부드럽게 감쌉니다. 허공에서 부유하는 먼지가 반짝이며 당신의 머리 위로 내려앉네요.
작은 책상 위에는 낡은 경전이 한 권 놓여 있습니다. 신도 중 한 명이 놓고 간 것 같네요.
루시:(어디간걸까? 루시는 불안한 마음에 이리저리 살펴본다. 눈동자가 조금씩 흔딜리다 책을 짚더니 페이지를 넘겨본다.)
당연하지만, 신을 숭배하는 글입니다. 괜한 짜증만 늡니다. 더 읽을 필요도 없네요.
이렇게까지 돌아다녔는데, 로제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먼저 돌아간 걸까요?
이렇게까지 찾아봤는데 없는 걸 보면 신전에 없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루시, 돌아갈래요?
루시:(로제타를 조금 더 찾아보는건 어렵나? 불안해서 두고 갈 수는 없는데.)
그러게요, 혼자 두고 가기에는 불안할지도 모르겠어요.
조금만 남아서 로제타를 기다려볼까요?
루시:(그러지 뭐. 돌아가봤자 아무도 반기지 않을 집에 일찍 들어갈 필요는 없으니까...)
루시가 신전에 서서 로제타를 기다리는 동안,
갑자기 머리 위로 샹들리에가 떨어집니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샹들리에가 산산조각 나서 루시의 발 밑으로 파편이 떨어집니다.
로제타 :세상에, 이게 무슨 소리야! 루시, 괜찮아?!
루시:로즈! 걱정했어요... (파편 부스러기를 아무렇지 않게 밟고 지나친 루시가 로제타에게 환하게 웃으면서 다가간다. 샹들리에는 저번에 썼던 결말 아니야? 진부하잖아. 파편을 흘겨본 루시가 로제타의 양손을 꼭 쥔다.) 어디 갔었어요? 한참 찾았어요... (이윽고 손을 제 뺨에 가져다 문지른다.)
로제타 :너, 너 얼굴에서 피나! (파편에 긁힌 뺨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새파래진 채 드레스 소매로 루시의 얼굴을 닦아낸다. 하얀 천에 새빨간 선혈이 묻어나왔다.) 이 시간까지 날 찾아다닌 거야? 미안해, 구경하다 보니 길을 잃어서... 어, 어쩌지. 계속 피나는데... 돌아갈까? 미안해, 나 때문에...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루시의 뺨에 갖다댄 소매에 점점 피가 번졌다.)
루시:로즈, 진정해요. 전 괜찮아요. (흉지려나? 어차피 내일이면 감쪽같이 사라질 흉터였다. 루시는 지금은 그저 로제타를 찾은게 기뻤다. 더군다나 이렇게 걱정해주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다.) 어차피 검을 쓰면 자주 생겨요. 로즈의 탓이 아니에요. (루시가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로제타가 나를 위해 울어줘서 기뻐요. 그 말이 목구멍에 걸려서 나오지 못했다.)
로제타 :얼른 돌아가자, 얼굴에 흉 남으면 어떡해. (얼굴에 시선을 꽂고 있던 로제타가 루시의 몸을 보자 입을 틀어막는다.) 너, 너... 여기저기서 피 나잖아. 괜히 나 때문에 신전까지 와서. (꾹... 루시의 손을 잡은 로제타가 입술을 깨문다.)
그렇게 로제타의 손에 이끌려 저택으로 돌아옵니다.
한참이나 당신의 상처에 약을 바르고 피가 멎은 것을 거듭해서 확인하고 나서야 로제타가 돌아가네요.
오늘은 예상치 못한 수확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간 왜 한 번도 신전에 가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많은 걸 알아낸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난 ‘열아홉 번’의 삶보다는 많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어쩌면 이 정보가 당신의 끔찍하게 지겨운 반복을 멈춰줄지도 모르죠.
그나저나 오늘따라 밤공기가 좋은데, 후원에서 산책하지 않으시겠어요?
루시:(이제 슬슬 죽을 때 되지 않았나? 방에 있는 것보다야 색다르게 죽을테니 루시는 그냥 나가보기로 했다. 암살자를 만나 죽는 것보다 발 헛디뎌 연못에 빠져 죽는게 낫겠다 싶어서...)
산들거리는 밤바람에 희미한 꽃향기가 섞여 듭니다.
잘 가꾸어진 정원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지루한 일상에서 몇 안 되는 행복이기도 하죠.
루시, 이성 1 증가.
제가 하자는 대로 하길 잘했죠?
...
그렇게 한참이나 후원을 산책하던 당신 앞에 불쑥 검은 형체가 나타납니다.
아, 암살자인가 보네요. 당신의 추측이 맞기라도 했다는 듯, 검은 형체는 당신을 향해 무언가를 휘두르지만…….
안타깝게도 개구멍으로 빠져나가려던 가문의 기사가 발견한 모양입니다.
허공을 가르고 빠르게 날아온 단검에 검은 형체가 휘두르려던 게 힘없이 떨어집니다.
들켰다고 생각했는지 검은 형체는 훌쩍 담을 넘어 도망갑니다. 어차피 당신을 이런 방법으로 죽일 수 없었을 텐데, 그걸 모르다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기사:아, 아가씨.... (몰래 외출하려다 들킨 것이 머쓱한지 쭈뼛거리며 루시 쪽으로 다가온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루시:난 상관없는데. 지금은 저걸 따라가서 잡아오면 더 고마울 것 같아. (어차피 기사도 그녀에게 충성심 같은게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 저택에 개구멍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기사:네, 넵! 지금 당장 가서 잡아오겠습니다!
줄행랑을 치듯 기사는 검은 형체가 사라진 쪽으로 급히 달려갑니다. 암살자가 사라진 지는 꽤 되었으니 잡아올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어요.
루시, 가서 암살자가 떨어뜨린 검이나 살펴볼까요? 암살자를 잡을 단서가 될지도 몰라요.
루시:(루시가 검을 집어든다. 이걸 들고 설치다니, 대범한걸. 그녀도 나름 기사인데. 너무 얕보인거 아닌가, 싶었다.)
암살자가 쓰는 검 치고는 굉장히 화려한 검입니다.
살펴보면 날도 그리 날카롭지 않아서, 사람을 죽이는 데에는 쓰기 어려울 것 같이 생긴 검이에요.
이런 검을 가지고 감히 바스커빌 가문의 루시를 죽이려 하다니, 암살자 치고 너무 허술한 거 아닌가요?
그런데 잠깐……. 이 검, 어딘가 눈에 익지 않나요?
루시:
지능
기준치: 50/25/10
굴림: 27
판정결과: 보통 성공
몇 번째 삶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분명 로제타가 루시에게 보여주었던 검입니다.
이렇게 보석이 잔뜩 박힌 사치스러운 검이 두 개씩이나 존재할 리가 없어요.
그런데, 로제타가 당신을? 왜요? 로제타는 당신을 사랑하던 게 아니었나요?
...
그때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느낌이 들더니 입가로 피가 새기 시작합니다.
아, 시작됐나 보네요.
독이냐고요? 아니요. 이번에는 전염병이에요.
오늘 방문한 신전에 ‘우연히’도 전염병 환자가 방문했거든요.
잠복기는 없고 전염률과 치사율은 100%! 대단한 병 아닌가요? 당신이 만진 경전이 어쩌면 그 환자의 것이었던 걸지도……?
그래도 죽음은 이제 익숙하잖아요? 지겨울 뿐이지.
장기를 죄다 끄집어내 하나하나 불에 태우는 듯한 고통도, 바다에 빠진 듯한 따가운 숨 막힘도 잠시일 거예요.
고통에 귀족의 품위 따위는 천당에 내던지고 후원의 바닥을 사납게 긁고 있어도,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해 화살에 꿰인 짐승의 단말마처럼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 것도 잠깐이잖아요!
그렇게 흉흉하게 노려보지 마세요! 이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건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요. 잘 자요, 루시.
오늘 아침에 봐요!
...
푸른 하늘,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과 완벽한 날씨…….
당신은 언제나처럼 오전 10시에 눈을 뜹니다. 침대 옆에는 언제부터인가 낡은 일기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앗, 저 여기 알아요! 당신은 여기서 당연하다는 듯 일기장을 넘기겠죠?
제가 누구냐고요? 당신의 ‘일기장’이잖아요! 뭐, 굳이 애칭을 붙여주고 싶다면 마다하지 않겠지만요!
아무튼, 오늘을 시작할 시간이에요. 정신 차리고 일기장을 넘기라구요!
루시:너, 누구야? (루시가 허공에 말을 걸었다. 자꾸 일기장, 일기장 하는데 시끄럽기도 모잘라 기만하는 것 같아서 루시가 천장을 노려본다.) 이번엔 안 넘길거야. 대답하기 전까지.
왜 이러세요, 저는 당신이 아끼는 일기장일 뿐이라고요!
제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서 그러시는 건가요? 그런 거라면 마다하지 않겠지만... 빨리 읽어주세요! 당신이 읽어주지 않으면 일기장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져버린다구요! (ㅠ.ㅠ)
루시:(...됐으니까 넘어가자. 술 마실 줄 아는 일기장이 어디 한 둘이나 싶다. 머리 아파서 생각을 관둔 채 일기장을 열었다.)
저를 의심하시다니 너무해요!!
지금처럼 빨리 일기장을 넘겼으면 좀 좋아요?!
그 뒤로도 끊임없이 이어진 기록들은 루시, 당신의 ‘사망 내역’입니다.
언제 어떻게 사망했는지에 관하여 나열되기만 한 내용들이죠.
정확히 스무 번의 죽음이 기록된 일기장을 덮기 무섭게 하녀 아이가 부산스러운 소리를 내며 방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왜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을까요?
...
로제타 :안녕, 루시. 잘 잤어?
왜 로제타가 테라스에서 나타나는 거죠?
루시:안녕, 로즈. (너무 당황한 나머지 되려 침착하게 인사해버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혹시 우리가 저 모르는 사이에 부부가 됐나요? 그래서 이렇게, 아침에 로즈가 날 깨우는 거고? (...) 너무, 너무 신기해서... 머리가 아픈데. 무슨 일이에요? (일단 시야에 로제타가 보이니 루시의 얼굴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진다.)
로제타 :그랬으면 좋겠다. 매일 같이 일어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지간히도 놀랐는지 얼빠진 얼굴...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와 로제타가 루시의 침대에 걸터앉더니, 양손으로 부드럽게 루시의 얼굴을 잡는다.) ...루시, 많이 아팠지? 어제는...
루시:... 전염병... (루시가 멍하니 중얼거린다. 너무 가까운데... 로제타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했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경전에서 읽었던 글자들이 어지럽게 떠올랐다. 빛, 어둠, 세계, 에딜루스, 공허, 오류...) 로제타가, 로즈가 날 죽였나요?
로제타 :아니야... 나는 어제 널 못 죽였어. 이번에야말로 끝내주자고 다짐했었는데. (머릿속이 복잡하구나. 로제타의 손이 사랑스러운 것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루시의 얼굴을 쓸어내린다.) 난 한 번도 널 못 죽였어. 못 하겠더라고... ...많이 아팠어?
루시:다섯 번 까진 아팠고, 그 뒤는 견딜만 했어요. (그리고 열번 째부턴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오감은 사라지고 죽는구나, 하는 감상만이 남았다. 내가 이 모든 전생을 흘려보낼 수 있었던 이유가 당신 때문이란걸 알까?) 로제타에게, 그런 짐을 지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전... (하녀와 귀족이 낳은 사생아, 잔챙이, 식충, 까마귀 공녀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민 당신에게 어떻게 그런 슬픔을 안길 수 있을까?) 로즈, 그러면, 내가 드레스를 가려준 것도 기억하나요?
로제타 :...응. 미안해, 저번에 기억 안 난다고 거짓말 해서. 그때 떨렸어. 나, 별로 거짓말을 잘하는 편은 아니거든. (애써 웃어보지만 로제타는 괴로워보이는 표정이었다. 루시를 꽉 끌어안은 로제타가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바보. 짐을 지게 하고 싶지 않다는 핑계나 대고, 나한테 아무런 말도 안 해주고. 너 때문에 너무 많이 헤맸잖아. 네가 같은 이유로는 죽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면 더 빨리 할 수 있었을 텐데. (꾸짖는 듯한 말투였으나 정말로 루시에게 뭐라고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로제타가 움직일 때마다 이불이 작게 바스락거렸다.) 괴로웠지?
루시:로제타를 매일 볼 수 있어서, 힘들지 않았어요. (진심이에요. 루시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로제타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그러니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 짓지말아요. 로제타의 분홍빛 머리카락에 루시가 얼굴을 비빈다. 검정색 머리카락이 마구 뒤엉켰다.) 핑계가 아니에요. 내 일에 로제타가 휘말리면, 그거야말로 참을 수가 없어서... 아. (불현듯 생각난 건, 이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다면 로제타도 계속 죽었다는 뜻일까? 루시의 눈동자에 불안이 조금씩 차올랐다.) 로즈도, 혹시 계속 아팠나요? 그, 그렇다면, 저는... (연약한 로제타가 그런 고통이 아프지 않을리 없었다. 루시의 손아귀에 점차 힘이 들어간다.)
로제타 :... (로제타가 말없이 빙긋 웃는다. 아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차피 금방 끝나는 거, 루시를 찾아야한다는 마음 하나로 버텼다.) 괜찮아, 아프지 않았어. 네가 가는 곳에는 당연히 나도 가야 하는 거잖아. 네가 있으니까 괜찮아... (괜찮아. 주문을 외우듯 루시에 귓가에다 대고 로제타가 연신 중얼거렸다. 우리는 괜찮아질 거야... 루시를 달래는 건지 스스로를 달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있잖아, 루시. 신전에서 얼마나 알게 됐어?
루시:(루시는 신이 있다면 지금 신을 찢어죽이고 싶었다. 자신은 괜찮았다. 그러나 로제타는 그런 일을 겪어선 안됐다. 그녀의 눈에 새파란 분노가 일렁이고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속으로 신을 저주하고, 또 저주하길 반복했다. 운명의 장난감은 한명으로 족하지 않나?) 잘,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글을 잘 몰라서. 뭔가 신이 만들 때 오류가 생겨났다는 것 외엔... (관심 없었으니까. 그녀의 삶은 온통 로제타 뿐이었다.)
로제타 :왜 그런 얼굴이야? 난 정말 괜찮아. 그런 표정 하지 마, 나 속상해... (허리에 올려진 손이 떨리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루시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갖다댄 로제타가 루시의 얼굴에 여러 번 입을 맞췄다. 루시의 심장이 분노로 쿵쿵 울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똑똑하네. 그 정도 이해했으면 충분해, 루시. 전부 이해를 못했다면 내가 도와주면 되는걸. 그러면... 루시가 생각하기에는 나랑 너, 어느 쪽이 오류인 것 같아?
루시:저 아닐까요. (루시는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생각했다. 로제타가 입을 맞출 때마다 루시으 눈꺼풀이 조금씩 떨렸다.) 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로제타가 아프니 자신이 여러번 죽는게 나으니까. 루시는 불안한 얼굴로 로제타를 쳐다본다.) 로즈는, 어떻게 생각해요?...
로제타 :음~. 땡. 정말 바보구나? (이런 상황에도 밝게 웃음소리를 낸 로제타가 루시의 목에 고개를 툭, 떨군다. 루시의 체향이 하나도 무섭지 않게 해줬다. 뭐든지.) 오류는 나야. 그러니까, 계속 반복되는 걸 멈추고 싶다면...
어떻게 할래, 루시? (다시 상체를 일으킨 로제타가 누워있는 루시를 내려다본다.) 이제 끝낼 수 있어...
루시:로제타는, 제가 로즈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루시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로제타를 올려다본다. 슬픔도, 화도, 삶을 끝낼 수 있다는 기쁨도, 그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은 무표정. 루시와 로제타가 처음 만난 날, 그 화려한 연회장에서 홀로 어둡던 그때 그녀의 얼굴이었다.) 난, 나를 수천 번 죽일 수 있어요. 로제타가 원한다면 로제타를 제외한 모든 인간을 죽일 수 있어요. 다만...
당신을 죽인다는 선택만큼은 절대 할 수 없어요, 왜냐면, 난...
당신 상상 그 이상으로 당신을 원했어요, 늘... 그 화려한 연회 속에서 늘 당신을 한 번에 찾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당신을 죽이라는, 그런 잔인한 부탁을 내게 하지마세요. 난, 내 삶을 전부 포기해도... 로제타는 포기 할 수 없어요.
로제타 :정말? 기뻐라. 너무 능숙한데, 열아홉 번이나 서로 좋아해서 그런 걸까? (루시의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겨준 로제타가 미소 지었다. 까마귀 공녀. 그러나 내 눈에는 세상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내 까마귀. 다들 불길하다고 여기는 검은 머리가 자신의 눈에는 무엇보다 빛나 보였다.) 눈 딱 감고 날 찌르기만 하면 되는데, 나는 네가 싸웠던 어떤 상대보다 약할 테니까 금방 끝날 거야. ...이렇게 말하면 화낼 거지?
내가 생각한 다른 방법도 있어. 너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죽었을 때, 한 번도 스스로 죽어본 적은 없었지? (로제타의 손이 루시의 목 위로 올라간다. 움푹 꺼진 부분을 따라 느리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루시의 쇄골 위에 닿는다.) ...내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어? 근데, 너한테 그런 일을 시키고 싶지는 않아. ...그치만, 네가 무슨 선택을 한다 해도 난 널 따라갈 거니까...
루시:그거 알아요? 나는 그 어떤 전장에서도 로제타, 당신보다 더 강한 적을 만난 적이 없어요. (루시는 조용히 몸을 일으킨다. 그렇게 한동안 로제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 있더니, 이윽고 천천히 일어나 장식으로 걸려있던 휘장의 검을 빼낸다. 처음 검을 든 날의 기억이 까마득했다. 탁한 과거 속에서도 난 무엇을 위해 살까 고민하던 순간에, 당신을 만났던 그 날 만큼은 너무도 선명해서...)
안녕, 로즈. 내일 봐요.
(너무나 간단하게 그녀는 상체에 검을 찔러 넣었다. 당신의 표정이 궁금해. 울고 있지만 않았으면, 하고 바랬다. 입술 사이로 피가 흐르고, 시야가 뿌얘져서 로제타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심장에서 느껴지는 고통보다 괴로웠다.)
로제타 :(침대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제타가 쓰러진 루시의 몸을 끌어안는다. 얼굴이 눈물로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네가 이런 선택을 할 걸 아니까 말해주고 싶지 않았어. 차라리 네가 날 찌르는 편이 행복했을 거야. ...이런 얼굴, 네가 보지 못한다는 게 다행이야... 한참이나 온기가 남아있던 루시를 끌어안고 있던 로제타가 조심스레 검을 빼냈다.)
잘 자, 루시, 내일 보자...
(처음 너를 따라 죽을 때는 너무 무서웠는데, 이제 눈을 떴을 때 너를 만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무섭지 않아. 무기라고는 잡아본 적 없는 고운 손이 어설프게 검을 쥐었다. 로제타가 망설임 없이 복부에 칼을 찔러넣던 루시의 몸짓을 따라해본다. 가녀린 몸이 그대로 루시 위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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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과 완벽한 날씨…….
비얘 (GM):당신은 언제나처럼 오전 10시에 눈을 뜹니다. 침대 옆에는 언제부터인가 낡은 일기장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당신은 언제나처럼 오전 10시에 눈을 뜹니다. 침대 옆에는 언제부터인가 낡은 일기장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익숙한 자리를 더듬어도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습니다.
정말 회귀가 끝난 걸까요?
때마침 하녀 아이가 부산스러운 소리를 내며 방 안으로 들어옵니다.
하녀:아가씨, 좋은 아침이에요! 어제 연회는 잘 다녀오셨어요? 오늘은 일정이 따로 없으신데... 아침은 어떻게 준비...
아, 아가씨. 옆에 주무시고 계신 분은 누구세요?
카티츠 3년, 7월 2일. 스물두 번째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7월 2일의 아침을 봅니다.
희열도 잠시, 하녀의 이야기 속에서 이질적인 내용을 발견합니다.
옆에 누워있는 사람이 있다고요?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로제타가 보입니다.
루시와 로제타의 묘한 기류를 눈치챈 모양인지, 하녀 아이는 어느새 꽁무니를 빼고 없습니다.
아이고 또 목이……. 농담이에요. 이제 마지막인데 목이 마르더라도 참아야죠.
일기장이 없어졌는데 저는 왜 아직도 여기에 있냐고요? 당신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기 위해서죠.
세계의 오류를 훌륭히 해결한 당신! 제 권한으로 당신에게 커다란 선물을 드릴게요.
이번에도 선택지는 두 가지예요. 당신은 원래 여기에 속한 사람이 아니에요.
원치 않는 세계에 떨어졌죠? 다시 원래 세계로 돌려드릴 수 있어요.
두 번째 선택지는 원래 세계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 이 세계에 남아 있는 거예요.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이 세계는 더 이상 오류에 위협받지 않거든요. 완벽히 안전한 세계예요!
어떻게 할래요, 루시?
루시:그야, 당연히, 여기에 남을거야.
로제타랑, 내일 아침을 보기로 약속했으니까.
좋아요, 루시.
당신의 선택에 만족하길 바라요.
당신의 생각이 어떻든 저는 이제 정말 떠나야 할 시간이에요. 잘 있어요, 루시. 그동안 고마웠어요.
...
스물두 번째 반복 끝에 귓가에 들리던 시끄러운 소리가 멎습니다.
이제야 완전한 끝을 맺은 기분입니다.
루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로제타를 바라봅니다.
이 결정에 만족하는지, 이 이야기가 해피 엔딩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End 1. 카티츠의 초여름 끝에서
로제타, 루시 생환.